“전 제가 쓴 책을 매일 읽어요.” 첫 만남에서 나온 그녀의 한 마디였다.
그녀는 자신을 기억해 주는 여자로 소개했다. 잊히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다소 모호한 설명을 덧붙이며. 명함도 꺼내 보여주었다. <기억해 주는 여자, 이해영> 특별히 의심되지는 않았다. 부드럽지만 단단한 그녀의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그 사실을 납득하게 만들었으니까.
그녀는 자신이 쓴 책들을 보여주었다. 한 장 한 장 인쇄한 종이를 엮어 만든 얇은 책들이었다. 각 책마다 써진 이름들은 고객의 것이라고 했다. 한창호, 이 열, 정현우… 물론 책의 내용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책에는 고객의 정보가 들어있었고 아침에 일어나서 모든 책을 정독하는 것이 그녀의 일과였다.
“누군가 자신을 기억해 주길 원하는 사람들이 많나요?”
“꼭 혼자 남겨진 사람만이 저를 찾는 건 아니더라고요.”
누구든 외로움과 공허함을 느낄 수 있었고, 고객의 대부분은 남자였다. 그들이 비용을 지불하고 그녀에게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하면 그녀는 그것을 책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책을 매일 읽으며 그들의 삶을 인정해 준다고 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당신을 기억하는 사람이 여기 있다-
우리가 사귄 뒤에도 그녀가 고객을 만나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다만 가끔 걸려오는 전화를 받은 그녀가 “네, 알고 있어요, ㅇㅇ씨.”라고 말하는 것들을 본 게 전부였다. 그러던 중 그녀가 함께 고객을 만나자고 제안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상대는 아직 대학생으로 보였지만 대학생 특유의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 옆에 앉은 나를 보고도 “한 사람이라도 더 기억해 주면 좋겠죠…”라는 힘없는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그를 보는 그녀의 모습은 사뭇 진지했다. 녹음기를 켜고 그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뚫어져라 쳐다봤다. 중간중간 짧은 질문을 하면서, 대답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가 끝난 뒤 비용에 대해 설명하며 자리는 마무리됐다.
“생각보다 별건 없죠?”
“꼭 상담을 하는 것 같네요.”
“하지만 이 책이 완성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게 돼요.” 그녀는 기록에 사용한 노트를 꽉 쥐었다.
직업의 특별함 말고는 보통 연인들과 같았기에, 우리는 몇 년의 교제 후 헤어지게 됐다. 가끔가다 그녀가 생각이 나면 그녀는 내 이름이 적힌 책을 갖고 있을까, 그것을 매일 읽어줄까 따위의 질문이 떠올랐다.
가을이 네 번쯤 지나갔을 때 그녀에게 연락이 왔다.
“좋지 못한 병이래요.” 병실 침대에 기댄 그녀가 말했다. 부스스한 머리를 정돈할 여유도 없어 보였다. 그녀는 침대 밑에 있는 상자를 가리켰다.
“받아줘요.”
“난 저 책들을 매일 읽을 자신이 없어요.”
“그냥 받기만 해 줘요. 재헌 씨가 받았다는 사실을 내가 기억하면 되는 거니까.”
그녀는 눈을 감고 작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상자를 트렁크에 싣고 운전을 해 병원을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답답한 일이 있을 때마다 들르던 한강 공원에 차를 세웠다. 해는 이미 져서 검게 변해버린 강물이 출렁이고 있었다. 상자를 꺼내 내가 기억하는 이름을 찾았다. 김도윤, 김병렬, 김시원… 김우진. 눈에 생기가 없던 대학생. 책을 펴고 맨 앞장을 봤다. 역시나 전화번호가 있었다. 나는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몇 번 울리다 연결이 됐다.
“누구세요?”
“김우진?”
“네 맞는데요, 누구세요?”
전화를 끊었다. 우리가 만났을 때 너의 눈빛이 너무 죽어 있었다고, 그래서 가끔 네 걱정을 하며 몸을 뒤척였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상자를 정리하지 않은 채 다시 운전석에 앉았다. 멀리 자전거 몇 대가 불을 켜며 지나갔다. 누군가를 기억하기 좋은 밤이려나. 비어 있는 껌통을 만지작거리며 혼자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