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혈액형과 MBTI

머릿속에 든 거라곤 롤러스케이트와 테니스 공 야구밖에 없었던 시절인 초등학생 때, 큰길 앞에 있는 슈퍼마켓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 할짝거리고 있으면 어느새 친구들에게 둘러싸이곤 했다. 이미 불길한 예감을 느낀 나를 신경 쓰지도 않고 녀석들은 서로 순번을 매겨가며 줄을 섰다. 암묵적 약탈 행위가 시작된 것이다. 첫 번째 주자가 다가와 내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려는 순간, 나는 최소한의 방어권을 행사하며 녀석에게 외친다. “너 혈액형 뭐야?”

여기서 당황하거나 머뭇거리면 끝이다. 초등학생이기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덕성이 거짓의 유혹을 억누르고 진실을 내뱉게 만든다. “B형…” “그럼 안 돼, 난 A형이야.” 패자는 고개를 푹 숙이고 점점이 사라진다. 나와 같은 A형이라든가 걸쳐있는 AB형이라든가 아니면 누구와도 호환 가능한 무적의 O형만이 혈액형의 장벽을 뚫고 아이스크림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시기심에 불타던 어떤 아이들은 무작정 O형이 더럽다고 폄하하기도 했다. 하지만 O형들은 그런 폄하를 냉소적 태도로 받아들이며 꿋꿋이 과자를 뺏어 먹었다).

당시에는 단순히 친구들끼리 과자를 뺏어 먹을 때나 쓰던 혈액형이었지만 어느 시기에는 전 국민이 혈액형-성격 설을 믿었던 때가 있었던 것 같다. A는 소심하고, B는 지랄 맞고, O는 싸이코고, AB는 음, 뭐더라.

사람을 4가지로 분류했기 때문에 편하고 단순했던 시절.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면 으레 “걔는 B형이어서 나랑 안 맞아” “걔들은 같은 O형이라 잘 맞아” 따위의 말들이 들리곤 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A형이랑 B형인데 그렇게 잘 맞는다고?” 이 시기 혈액형-성격 설은 신성불가침의 영역 같은 거였기 때문에 누구도 그 이론을 부정할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단지 고개를 숙이고 “네, 전능하신 혈액형 님의 말씀이 다 맞습니다.”라며 두 손을 모을 뿐이었다. 물론 보이지 않는 곳에선 혈액형을 거꾸로 적어놓고 저주의 원을 그리는 피의 집단의식이 행해지고 있었을 수도 있다. 네, 죄송합니다.

지금은 민간인 우주여행이 가능한 시대이기에 이제 이 혈액형 이론도 예전처럼 힘을 쓰지는 못한다. 다만 더 무서운 놈이 등장했다. 경우의 수 네 개가 모여 16가지라는 악독한 분류체계로 완성된 MBTI라는 것이. 혈액형과 차이가 있다면 적어도 내가 답한 문항들로 계산되기 때문에 신빙성이 있다는 정도다. 혈액형 이론이 갖지 못했던 과학적 근거를 대충이나마 가진 것이다(사실 여기에 과학적이라는 단어를 넣는 게 맞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나를 인지하는 알파벳이 한자리에서 네 자리로 바뀐 것 말고는(나는 내 MBTI를 기억하지 못한다. 볼 때마다 기억하려고 하는데 계속 잊어버린다). 대화의 맥락도 비슷하다. “걔가 ENFP였다고? 역시나…” “걔랑 나는 MBTI가 정 반대야, 어쩐지 하나도 안 맞더라!” 이런 얘기를 들으면 어릴 때 혈액형 얘기를 들었던 식당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어찌 됐건 MBTI라는 새로운 종교가 등장한 것이다.

이러다간 복잡계 현상에 맞춰 16가지가 아닌 256가지 분류 체계가 등장할지도 모르겠다. “어디 보자… 너 말하는 걸 보니, 혹시 ISTJKOWM? 어쩐지!” 그 정도가 되면 편의를 위해 만든 분류체계가 그 기능을 상실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복잡한 생각은 미래의 AI에게 맡겨버리면 편하다. 어떤 SF 영화처럼 손목에 그걸 박아놓을 수도 있고.

사실 이렇게 썼지만 나는 아직도 혈액형과 MBTI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A형이기 때문에 이렇고, MBTI는 잘 기억 안 나지만 이런 사람이었던 것 같고… 계속 자아에 동일한 껍데기를 씌우는 느낌이 들지만 그렇다고 거부하고 싶지도 않다. 그냥 그러려니 하는 것이다.

첫 글인데 마무리를 어떻게 지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쓰다 보니 너무 멀리 와버려서 수습할 엄두가 나지 않는 상황. 분명 하루키 같은 글을 쓰려 했는데 왜 이렇게 돼버렸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보건대 이것도 내 MBTI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뭐, 아니면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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